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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딩/응답하라 2014

선풍기를 켠다는 것


2014년에 들어서고, 처음으로 선풍기를 꺼냈다.
며칠 전보단 더워지긴했어도 사실 선풍기를 켜고 지낼 날씨까진 아닌데,
미리미리 선풍기를 닦아놓자 하는 마음에 선풍기를 닦고, 시험삼아 켜본다는 게 한시간이 넘는 시간동안이나 선풍기를 못끄고 있다.
마침 방청소도 오랜만에 했겠다. 선풍기도 있겠다. 할 일도 딱히 없겠다.
이불 위에 드러누워 가만히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를 듣고있자하니, 정말 여름이 된 것만 같다.
뭐 입하(入夏)가 지난지 20일 가량이나 됐으니, 이론상 여름이긴한데, 그냥 기분상 봄기운이 채 가시지 않았다.
그런데 이 선풍기 하나로 봄기운은 커녕 완전한 여름을 느낄 수 있다.
입춘, 입하, 입추, 입동.. 이런 건 사실 다 의미가 없다.
입춘이라 해도 눈이 내리기 마련이고, 입하라고 해도 벚꽃내음이 채 가시지 않았고, 입추라해봤다 부채들고 거리를 확보하고, 입동이 와도 눈은 오지 않는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춘하추동' 각각의 사계절을 완벽히 정의내릴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다른 건 모르겠고 이제 여름은 완벽히 정의 내릴 수 있다.
'선풍기를 켠다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여름의 시작이 아닐까 싶다.
여름의 진정한 묘미는 쨍쨍내리는 햇볕도 아니고, 반팔반바지도 아니고, 해수욕장도 아니고 이렇게 한여름밤에 선풍기를 틀어놓고 밤을 즐기는 것이 아니겠는가.
선풍기도 선풍기지만 21일부로 내 일상에서 '바쁨'이 사라졌다.
맨날 '바쁘다.''시간없다.''피곤하다.'만 달고살던 내가 잉여가 됐다.
이걸 여유롭다고 해야하나, 잉여롭다고 해야하나.. 여튼 갑자기 찾아온 자유시간에 뭐부터해야할지 이 시간들을 주체할 수가 없다.
어제는 그냥 수업이 끝나고 학교를 어슬렁거리다가 집에 와서 마녀사냥 재방송을 보고 잠을 잤다.
그래서 오늘은 뭐 색다른 걸 하고싶었는데, 고작 하는거라곤 선풍기 틀어놓고 누워있는 게 끝이다.
하긴 한창 바빴던 며칠 전을 돌이켜보면, 내가 가장 하고 싶던게 이렇게 별거 아닌 걸 하면서 무의미하게 시간을 떼우는 것일지도...
2주만 지나도 다시 기말고사라고 '바쁘다바빠'를 입에 달고살면서 지금 이 순간은 기억도 못할테지만...
그냥 기말고사고 뭐고 마음껏 이 순간을 즐기고 싶당.
그러고 보니 벌써 다음주면 종강이다.
진짜 뭐 한 것도 없는데 끝이다. 작년만 해도 그렇게 안 가던 시간이 왜이리도 잘가는지..
사실 시간이 빨리갔다기보단, 그냥 닥친거 하나하나 끝내다보니 종강이 왔다고나 할까...
이 곳에서 보내는 마지막 학년, 그리고 마지막 1학기이다.
며칠 전 문득 이제 이 하루하루들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드니 기분이 묘해졌다.
오늘도 내가 이 곳에서 보내는 4학년으로서의 마지막 5월 25일이다.
마지막이란 건 참 애틋한 것 같다..
말레이에서는 늘 한국에 가게되면 다시 오기는 힘들다라는 생각으로, 꾸역꾸역 여행도 가보고, 행사가 있다고 하면 꾸역꾸역 참가해서 그런지 딱히 아쉽다거나 한 건 없었는데,
이 곳 강릉에서는 익숙함에 젖어 마지막이란 생각도 못하고 지나오다보니 나도 모르게 마지막이 되어있었다.
막상 난 학교에서 걸어서 5분도 안걸리는 오죽헌도 못가봤는데 마지막이다...
마지막이란 게 무엇이든지 참 애틋하게 만들어준다.
점점 학교도 애틋해지고.. 다 애틋해지고 있다.
강릉에서 선풍기를 틀며 이불 위에 드러누워 보내는 5월 25일의 밤, 지금 이순간도 참 애틋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