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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82년생 김지영

지~인~짜 오랜만에 책을 읽었다.

국문학도에 도서관 알바만 1년 반을 했던, 책과 뗄래야 뗄 수 없는 환경에서 책을 안 읽기란 참 힘들텐데.

그런 상황을 이겨내고(?)까지 책을 너무나도 안 읽었다.

그러다 페미니즘 관련해서 공부를 좀 해보려고 82년생 김지영을 꺼내들었다.

그렇게나 도서관에서도 구하기 힘든 책이라던데, 영은이가 본인이 책을 갖고 있다며 선뜻 책을 빌려줬다.


이 책을 읽으면 그렇게 답답하고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던데... 나는 책의 중반부까지는 아무런 감정의 동요가 없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너무나도 내가 겪어왔던 일상이라 뭔가 이상하거나 특별한 점을 못느껴서였던 것 같다.

김지영의 모든 사건들이 극적이지 않고 일상에서 흔히 겪을 수 있는 일들이어서 더욱 그랬다.

그러다 후반부에는 결혼 후의 일들이 나오기 시작하는데, 그때부터 뭔지 모를 답답함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전 글들은 그냥 나의 일상을 돌아보는 기분이었다면,

갈수록 내가 몰랐던 그리고 겪어야하는 일들이 나오기 시작하니 불안하고, 무섭고, 화가 났다.

어줍잖게 '여자는 결혼하면 더 힘들겠지'라고 생각해봤지만 이렇게 내 미래를 직설적으로 대면하고 있자니 답답했다.

언어학을 배울 때 사람은 구정보보다 신정보에 더 집중한다더니

내가 몰랐던 '내가 겪어야 할' 이야기들이 나오니 더욱 몰입하게 됐다.

그리고 책의 중간중간에 소설답지 않게 정보출처를 적어놓은 주석들이 많이 보이는데, 나는 이 주석들이 작가의 발악같이 느껴졌다.

우리에게는 일상인 이야기들이지만 이런 일상을 겪어보지 않은 남성들은 정말 '소설'이라고 느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혹자는 그래도 '소설이니까 나름 극적으로 쓴거지'라고 할 수도 있을 것같아서

그런 생각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작가의 의도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통계청이며, 기사며 어떻게든 이것은 소설을 빙자한 현실임을 알리고 싶은 마음이 느껴졌다.

그리고 어딘가에서 인간이 극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원동력은 '경험'이라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사실 모짜르트의 곡은 지금에야 누구나 흔하게 연주하는 곡이지만

몇백년 전만해도 모짜르트의 곡은 '인간이 연주하기 힘든 곡'으로 분류됐다.

하지만 누군가 바이올린으로 연주를 해내는 순간 그것은 스스로 '사람이 할 수 있다'는 경험을 주기 때문에

이후 사람들은 전보다 훨씬 그것을 수월하고 해내고있다는 글.

82년생 김지영을 보면서 '모성애'도 그런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출산 후 좋지 않은 몸으로 집안일은 물론, 일까지 해내는 어머니들은 사실 불가능할 법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인데,

그동안 수많은 어머니들이 그 위대함으로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어버렸으니,

후세에 나온 수많은 어머니들이 그 경험으로 자신들도 그것을 해낼 수 있다고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고.

그 당연함이 여성들의 포기와 힘듦이 아무것도 아닌것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듯 하다.

그리고 그 수많은 어머니들이 어려운 것을 해내고 있어서 사람들은 모성애라는 이름으로 해내는 것들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그동안 많은 것들이 불합리해도 불합리한 일을 당하는 것보다 불합리한 일을 뜯어고치는 과정이 더 힘들다는 것을 많이 겪어왔다.

그래서 사실 이 부조리함을 알고 있으면서도 모른척했다는 게 더 맞을 수도 있겠다.

크게 운동이란 이름을 붙이고 무언가를 하는 것은 둘째치고

모임자리에서 여성으로서 받아들이기 힘든 우스갯 소리조차 고쳐주지 못하고 지나갔으니까.

정말 희한하게도 책을 덮고 심심해서 오랜만에 옛날 시트콤 <연인들>이 생각나 틀었는데 '여자로 산다는 것'이라는 에피소드가 나왔다.

열심히 공부해서 의사가 돼도 여성이라 희롱받기 일쑤이고, 차끌고 운전만해도 욕먹는 여성들이 나온다.

내가 '하필' 이런 에피소드를 고른 것일까. 아니면 너무 흔해서 아무거나 골라도 이런 에피소드가 나오는 것일까.

이제는 내가 여성으로서 겪고, 보는 이런 일들이 당연한 것인지, 아니면 당연하지 않은 것인데 내가 느끼지 못하는 것인지 분간조차 하기 힘들다.

그나저나 정말 오랜만에 책 읽으니 좋네. 아 그동안은 마음이 너무 불안해서 가만히 무얼하는 걸 못했는데, 이제 내가 조금의 여유라도 생긴 것일까.

책읽고 많이 생각해야겠다. 영은이가 준 책도 마저 읽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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