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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득권의 자각

일반인들이 출연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한 에피소드당 최소 50명에게 컨택을 하고 미팅도 수없이 진행한다. 따로 미팅을 위한 업무 시간이 주어지지도 않기에 업무 중에 찾아오는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 참 정신없는 업무의 일종이다. 그렇기에 따로 예비 출연자를 위해 우리의 업무 스케쥴을 맞추기보단 우리의 정해진 스케쥴에 맞춰주기 쉬운 사람들을 위주로 컨택하는 편이다. 

일반인이 출연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출연자를 섭외하기 위해 온갖 사이트를 뒤지며 사람을 찾곤하는데, 나의 레이더 망에 걸리는 사람은 여성이 많고, 거기에 종종 아이를 키우는 여성분들도 더러 있다. 그러다 최근들어 내 행동을 자각하고 흠칫 놀랐다. 내가 아이를 키우는 여성분들을 아예 출연선상에서 제외시키고 있었다.

일반인에게 컨택을 하면 사전 미팅에 응하는 경우는 10명 중 1명 꼴, 그 중 실제로 만나 우리 프로그램 핏에 걸맞다 생각하는 사람은 3명 중 한 명꼴. 때문에 프로그램에 걸맞은 사람을 찾기 위해 정말 수많은 사람을 컨택하고 미팅을 수없이 진행한다. 하지만 미팅을 위한 업무 시간이 따로 주어지진 않기에 업무 중 짬을 내어 미팅을 한다. 그래서 최대한의 업무 효율을 위해 '사전 미팅에 응할 수 있는' '우리의 정해진 촬영 시간에 맞출 수 있는' '돌발 상황이 일어나지 않을' 사람 위주로 컨택을 하게 된다.

이전에 한 번 아기 엄마와 사전 미팅 약속을 잡았다. 미팅 몇 분 전, 아기 엄마는 갑자기 아이가 아파 미팅에 참여하지 못할 것 같다는 연락이 왔다. 짜증이 났다. 개인 약속 마저 깨버리고 돌아갈 수밖에 없는 아기 엄마에 대한 안타까움보다, 그 분을 만나기 위해 컨택을하고 스케쥴링하고 미팅 세팅까지 할애했던 나의 업무 시간에 대한 아까움이 앞섰다.

그 이후로 나는 자연스레 컨택선상에서부터 아기 엄마를 제외시켰다. 바쁘디 바쁜 아기 엄마들은 돌발적인 상황이 많을 것 같았고 내 시간와 에너지를 들여 조율해야할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며칠 전에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꽤나 프로그램 핏에 맞을 것 같은 분이 있어 sns를 둘러보는데 아기 사진이 보이자마자 무의식적으로 뒤로가기를 눌렀다. 그리고 몇 초 뒤, 아차싶었다. 내가 아기 엄마들을 구성원 상에서 자연스레 제외시키고 있었구나. 내 '효율'을 위해서.

나도 이 사회에서 여성이라는 이유로 기득권들에게 많이 배제받아왔다 생각했는데, 어느샌가 여성인 내가 '미혼'에 '아이가 없는'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는 이유만으로도 '기혼 엄마'인 여성보단 많은 것을 쥐고 있는 기득권으로서 그들을 배제 하고 있다는 사실이 소름 돋았다.

그간 경력단절 여성이 생기는 이유는 사회가 '굳이 시간과 노력을 들여 여성을 배제시키기 위한 행동들이 모인 결과'라 생각했으나, 며칠 전의 나를 되돌아보면 그 이유는 사회는 굳이 '시간과 노력을 들이기 싫기 때문'이 아닐까.

내가 마치 내 업무 시간 몇 분, 몇 시간을 더 피해보기 싫어 아기 엄마들을 제외시켰던 것처럼, 그동안의 사회도 그저 아기 엄마를 위해 굳이 '비효율적인' 배려를 해야하나 싶었을 터. 

사실 약자를 배려한다는 것은 엄청난 비효율이다. 사회 속에 정체돼있지 않은, 자연스레 굴러갈 수 있는 사람을 끼워넣으면 최소한의 시간과 에너지로 최대의 효율을 낼 수 있다. 하지만 지금 그 안에 미처 낄 수 없는 누군가와 함께하기로 마음먹는다는 건 모든 걸 멈추고 심지어 새로 만들기까지 해야하는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다.

하지만 나조차 이렇게 효율을 위한 삶을 살다보면, 고작 몇 년 후 내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게 되면 나도 그 흐름 안에 끼일 수 없는 잉여인간으로 남을 것이 분명하다. 나는 이렇게 소박한 기득권자라는 이유로 훗날 사회에서 자연스레 배제당하기 위한 내 무덤을 파고 있던 것.

굳이 대의를 위해 내가 경력 단절 여성을 위하자느니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자는 말은 않아도 될듯하다. 언젠가 사회적 약자가 될지도 모를 나를 위해 이제부터라도 내 무덤을 파는 삽질이 아닌 어떤 상황에서도 내가 힘들이지 않고 구성원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초석들을 쌓고 싶다.

그리고 앞으로 내 프로그램 안에서 만큼은 아기 엄마도 흔쾌히 출연 가능한 프로그램으로 만들고 싶다는 바람이 생겼다.